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문단 편집) === [[1923년]] ~ [[1926년]]: [[뮌헨 폭동]]의 실패와 히틀러의 투옥 === 하지만 히틀러는 나치당 집회시 다른 정당의 정치 깡패에 맞서고 나치의 세를 펴기 위하여 자신의 명령으로 "[[SA|돌격대]]"를 창설하고 정치폭력배 집단을 통해, 타 정치 집단에 대한 무력 시위를 일삼으면서 천천히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시민들 앞에서 돌격대를 행군시키는 등 일반 시민들에게도 뭔가 다른 집단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나치당이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되자 돌격대는 사회혁명용 반란군 임무를 띄게 된다. 당시 나치당이 활동하던 [[바이에른]] 지방은 독일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지역이었다. 프로이센을 제외하면 독일제국 내에서 가장 큰 지방으로 다른 독일지역이 개신교 지역인데 반해 바이에른은 가톨릭이 강세인 지역이었으며 이에 따라 지방색과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면도 있고, 한편 이런 분리주의 성향에 반발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소로 불릴만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대전 패전 이후 극좌 세력의 무장 봉기로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되지만, 불과 6개월만에 (중도좌파) 사민당과 (중도우파) 중앙당의 연립 중앙정부의 주도로 군부와 극우 민병대가 다시 소비에트 정권을 무너뜨리는 등 극도로 혼란한 지역이었다.[* 당시 사민당 정권은 군부에 무장 봉기 진압을 "부탁"할 정도로 군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이것은 사민당, 중앙당 등 민간인 정치 세력이 1차대전을 주도한 군부를 밀어내고 집권한 것이 아니라 1차대전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기 싫은 군부가 자발적으로 퇴장한 뒤에 등장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세력들은 그들이 보기에 유약한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다른 우익 세력은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바이에른 지역을 장악한뒤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1923년도에 이르면 난립하던 바이에른 지역 우익 세력과 민병대 사이에 군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침 작센 지역에서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과격파가 합작하여 지방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베를린에선 우익 계열 민병대[*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규군 병력이 10만명으로 제한되어, 온건 좌익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조차 민병대를 묵인했다.] [[볼프강 카프]] 장군이 [[카프 폭동|쿠데타]]를 일으킨 데 자극받아서 나치당도 바이에른에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하지만 미리 포섭해놓은 바이에른 주정부 높으신 분들과 검찰, 경찰 나으리들이 중앙정부의 협박 때문에 나치당에 배신을 때리고 쉽게 제압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맥주홀 폭동]](Munich Beer Hall Putsch)'''이다. 마침 바로 전해인 1922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장악하는걸 보고 우리도 '바이에른을 장악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해서 독일 정부를 한번 뒤집어 엎어볼까?' 하는 아주 엉성한 계획을 시도했지만, 순식간에 망하고 히틀러는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체포당한다. 그러나 나머지 반란세력들은 주요 참여자라도 듣보잡들은 체포하지 않았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인물들이 재판에서 언플로 전국구로 뜨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재판 과정에서[* 바이에른 주정부, 군, 경찰에서 참여한 정황 때문에 라이프치히 국가 대법정에서 판결해야 하는데도 바이에른 임시재판소에서 재판한다. 그 덕에 이미 재판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판사 앞에서 열광적으로 현재 독일의 문제와 승전국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에 판사가 넘어가 히틀러의 형량을 줄여주었다. 반역죄는 중죄임에도 불구하고 판사를 잘 구워삶아서 비교적 가벼운 금고 5년을 선고받고 실제론 고작 9개월 복역하게 된 히틀러는 감옥 내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쿠데타 실패, 주요 인물의 투옥으로 세력이 열악했던 나치당은 붕괴 위험에 처한다. 히틀러는 무료함을 달래고 붕괴 위기에 처한 당을 재결집하려는 뜻에서 옆 방에 투옥된 [[루돌프 헤스]]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쓰도록 시켜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은 자서전 성격의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독일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히틀러는 후에 실제로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최초의 쿠데타는 위에 기술한 대로 실패했고, 이후의 숙청 등은 이미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 완전히 합법적으로 총통이 된 건 아니었다만 적어도 히틀러가 총리가 될 때까지는 합법적이었다.]에 발생한 일들. 독일 국민들이 전범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이렇게 그들이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라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이 동안의 나치당은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대부분의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후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지향하면서 히틀러와 갈등이 생기고 히틀러의 정권 장악 시도에도 반발하다가 결국 쫓겨나서 1934년 암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